다윈(1809~1882년)은 진화론과 자연선택설을 주장했습니다. 의학과 신학을 공부했지만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헨슬로 교수의 지지로 박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비글호 향해를 하며 이때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였습니다. 다윈은 이전의 과학자들과 달리 실질적인 증거자료를 제시하여 진화론을 명확한 과학적 사실로 정립시켰습니다.
1. 찰스 다윈의 어린 시절과 학업
다윈은 1809년 영국 슈루즈버리에서 태어났으며, 의사였던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암기식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을 관찰하고 동물을 채집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되지만, 해부학 실습에서 고통받는 환자들을 보며 학업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겨갔고, 여기서 존 헨슬로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박물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습니다. 헨슬로 교수는 다윈에게 자연을 관찰하는 방식을 가르쳐 주었고, 그를 비글호 항해에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2. 다윈의 도전적인 주장
당시 사람들은 신이 창조한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이 강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다윈은 인간이 신이 만든 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원숭이와 같은 조상을 공유하는 진화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윈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과 종교의 충돌을 일으켰고, 종교 지도자들과 보수적인 학자들은 그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주장은 인류의 기원을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을 열어주었으며, 자연을 신성시하는 기존의 가치관을 과학적 탐구를 통해 도전한 중요한 사례로 남았습니다.
3. 1800년대 과학 발전 배경
19세기 후반은 산업 혁명과 과학 혁명이 융합된 시기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연을 이해하고 제어하려는 욕구가 강해졌습니다. 전기, 증기기관 등의 발명으로 공장과 대중교통이 생겨났고, 삶의 질이 크게 변화했습니다. 과학자들은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실험적 접근을 통해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고, 이 시기에 자연과학은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다윈 역시 이 시기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며 생물학의 이론적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으며, 당시의 과학적 분위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4. 진화론의 초기 주장과 라마르크의 영향
장바티스트 라마르크는 다윈보다 앞서 생물체의 변화와 진화를 주장했던 생물학자로, 그는 ‘용불용설’을 통해 생물체가 환경 변화에 따라 형질을 변화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기린이 높은 나무의 잎을 따먹으려다 목이 점점 길어진다는 설명이 그 예시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증거가 부족해 많은 과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후에 다윈이 이를 과학적 관찰과 증거로 보강하여 자연선택설을 제시하면서 라마르크의 이론을 뛰어넘는 진화론을 확립하게 됩니다.
5. 비글호 항해와 탐험
1831년, 다윈은 비글호에 승선하여 남미와 태평양 지역을 탐험하는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5년에 걸친 이 항해에서 그는 전 세계의 다양한 기후와 지형에서 발견된 생물 종을 관찰하며 각 지역의 생물들이 환경에 따라 다르게 진화해왔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발견한 핀치새들은 다윈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는데, 같은 종이라도 섬마다 서로 다른 부리 형태와 크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통해 자연 환경이 생물의 생존과 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항해는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중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진화론과 자연선택설
비글호 항해 후, 다윈은 자신의 연구 자료를 분석하며 생물들이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다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그는 각 생물체가 작은 변이를 가지며, 그 변이가 생존에 유리한 경우 자연스럽게 선택되어 후손에게 전달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막에서는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식물이 생존할 가능성이 높고, 이 특성은 후대로 이어져 사막에 적합한 식물군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연선택의 개념을 통해 다윈은 종의 다양성과 적응의 기원을 설명하게 되었으며, 이 이론은 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7. 《종의 기원》 출간
1859년 다윈은 오랜 연구 끝에 《종의 기원》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생물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다는 관점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특히 인간이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책의 출간은 과학계뿐만 아니라 종교계와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신의 창조 질서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져 비판을 받았으나, 과학계에서는 진화의 증거를 제시한 혁신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습니다.
8. 헉슬리의 논쟁
다윈의 지지자 중 하나였던 토머스 헉슬리는 뛰어난 웅변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했습니다. 1860년 영국 옥스퍼드 대회에서 윌버포스 주교는 다윈의 이론을 조롱하며 헉슬리에게 “당신은 할아버지 쪽으로 원숭이와 친척인가, 할머니 쪽인가?“라고 비아냥댔습니다. 이에 헉슬리는 “차라리 알지도 못하는 학문을 교만하게 논하는 사람의 후손이 되기보다는 원숭이의 후손이 되는 것이 낫겠다”고 응수했고, 청중들은 크게 호응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윈의 이론이 과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고,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례로 남았습니다.
9. 다윈 진화론과 다른 주장들
1870년대에 바이스만은 세포설을 바탕으로, 체세포와 생식세포가 분리되어 있음을 주장하면서, 체세포의 변화가 생식세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후천적으로 발생한 성질은 생식세포에 전달되지 않으며, 후손에게도 유전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는 라마르크의 이론, 즉 후천적 특성이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는 주장을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돌연변이 가설로 유명한 드 브리스는 다윈의 진화론에 새로운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그는 진화가 점진적이고 사소한 변이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돌연변이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돌연변이가 자연환경에 더 적합한 경우, 해당 개체는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며, 이 변화는 후손에게 유전되어 새로운 종의 진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10. 다윈의 말년과 가족
다윈은 비글호 항해 이후부터 만성 위장 질환과 구토,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건강 문제로 인해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집에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839년 엠마 웨지우드와 결혼해 열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 중 세 명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윈의 자녀 중 일부는 과학자와 경제학자로 성장해 다윈의 지적 유산을 이어갔습니다. 다윈은 1882년 사망했으며, 영국 과학계의 중대한 인물로 인정받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국회의원과 과학자들의 추모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