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701~762년)은 시선으로 불리는 당나라의 시인입니다. 당현종 때 한림학시에까지 올랐으나 현종의 실정 이후 정치에 뜻을 잃고 방랑시인이 되었습다.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사를 남겼으며, 대부분 《이태백집》 30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 이백 시의 발전
당대에 시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로 과거제도에서 시를 필수 과목으로 선택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과거시험에서 시와 문장에 능숙한 자가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관직을 희망하는 자들은 시문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당나라 귀족 사회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 시가 귀족 사회의 주요 취미 활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백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았고, 풍류를 즐기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시인으로, 술과 이상향을 꿈꾸며 ’시선’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술과 자연을 즐기며 속세를 벗어나려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2. 이백의 출생과 성장 배경
이백 출생지와 가문에 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여러 설이 존재합니다. 촉 지역의 면주에서 태어났다는 설, 서역에서 아버지와 함께 이주해왔다는 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그의 가문 배경과 이주에 대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백은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몰두했고, 시문에 재능을 보였으며, 학문에 열정적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고향을 떠나 안릉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3. 조정 진출
이백은 방랑 생활 중에도 조정에 나가 황제를 보필하고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자, 그는 공소부, 배정 등 은일 생활을 하던 지식인들과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강호에 은둔하며 유교적 가치관을 지키려 했던 인물들입니다. 술과 시를 즐기며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했습니다.
이백은 그들과 함께 ‘죽계의 육일’로 불리며 예술적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그는 이런 활동을 통해 예술적 명성을 쌓았고, 사람들로부터 ‘천상의 적선인’이라 불리며 시적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명성은 빠르게 퍼져, 마침내 현종에게까지 전해졌고, 그는 조정으로 불려가 드디어 한림공봉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4. 궁중 생활과 갈등
궁에 들어간 이백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현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양귀비와 친분을 쌓기도 하고, 당시 큰 권력을 가진 환관 고력사와의 일화로 인해 그의 영향력은 커져갔습니다. 그가 ‘이한림’, ‘이공봉’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그러나 현종이 이백을 궁에 들인 이유는 그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백은 자유로운 기질로 인해 궁중의 예법에 적응하지 못했고, 황제의 측근들과의 마찰도 잦았습니다. 특히 양귀비에게 빠져 생활에 깊은 흥미를 잃은 현종을 보고 환멸을 느낀 그는 마침내 장안을 떠나 정치적 꿈을 포기하고 방랑 생활을 재개하게 되었습니다.
5. 안사의 난과 유배 생활
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당나라 조정은 큰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현종이 촉으로 피신한 이후 황태자가 왕위에 올라 숙종이 되었습니다. 이백은 현종의 아들 영왕의 군에 합류해 그의 막료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왕의 군대는 황실 내부의 분쟁으로 인해 반역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결국 영왕은 살해되었으며 이백 역시 체포되어 대역죄로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심양의 감옥에 갇혔으나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고, 이후에도 반란에 연루된 혐의로 아랑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도중에 사면 통지를 받아 풀려났고, 비로소 방랑의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6. 이백의 말년과 죽음
이백은 62세가 되던 해, 병든 몸을 이끌고 당도에 거주하는 친척 이양빙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구당서》에는 그의 만년 건강 악화의 원인을 과도한 음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겨울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이양빙에게 시문의 초고를 맡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7. 이백의 작품과 도가 사상
이백은 절구와 악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이상적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도가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자유롭고 이상적인 삶을 동경하는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가적 색채는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갈망을 잘 드러내며, 그를 ’시선’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했습니다. 그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감정을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태백집》 30권에 수록된 그의 시들은 지금까지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8.이백과 두보의 만남
744년 봄, 장안에서 관직을 떠난 이백은 동쪽으로 향해 여름에 낙양에서 두보를 만났습니다. 이백은 무한한 이상향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방랑 시인이었고, 두보는 비극적인 생활 속에서 안사의 난을 겪으며 목격한 인간의 비참한 현실과 몰락해가는 나라의 비극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두보는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7세 때 이미 <봉황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관직 운은 없어서 과거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했고, 궁핍한 생활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관직에 오르긴 했지만 안사의 난으로 장안에 묶이며 백성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이를 시로 승화했습니다.
두보는 동시대 시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시로 표현하곤 했으며, 이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 말의 술로 시 백 수를 짓고,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자며, 황제가 불러도 가지 않고 스스로 주정뱅이 신선이라 부른다.” 이는 이백이 열한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두보가 이백을 스승처럼 존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후 숙종 시절 두보는 관직에 복귀했지만 직언으로 인해 왕의 미움을 사 방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70세의 나이로 양쯔강의 폐선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시는 《두공부집》 20권에 담겨 전해지며, 고시와 율시가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