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세스 3세 – 해상민족을 정복한 왕

람세스 3세(B.C. 1220~B.C. 1156년)는 세트나크트(Sethnakth) 왕의 아들로 이집트 신왕국 20왕조의 두 번째 왕입니다. 해상민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리비아 인들의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마디나트 하부 신전을 완공했으며 카르낙 신전을 재건축했습니다.

1. 역사적 배경과 통치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는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 이어지며, 이 시기에 이집트는 강력한 통일국가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신왕국 후반기, 즉 제20왕조는 람세스라는 이름을 지닌 파라오들이 대거 등장하며 ‘람세스 시대’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람세스 3세는 고대 이집트 제20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로, 기원전 1180년부터 기원전 1155년까지 약 25년간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세트나크트 왕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집트의 마지막 강력한 통치자로 여겨집니다.

즉위했을 당시, 이집트는 외부의 빈번한 공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동쪽에서는 해상민족이 유입되며 이집트의 국경을 위협했고, 서쪽에서는 리비아 부족이 이집트를 끊임없이 침범했습니다. 이 외부 세력의 압박 속에서 람세스 3세는 이집트의 안정과 방어를 위해 군사적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내부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펼쳤습니다.

2. 외적 방어 및 전쟁

람세스 3세의 재위 5년째 되던 해에 리비아 부족이 이집트 서부 삼각주 지역을 침략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집트군은 리비아 부족을 물리치고 삼각주 서부 지역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재위 8년에는 해상민족 연합군이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이집트를 침공했는데, 람세스 3세는 이들에 맞서 두 차례의 육상전과 해상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집트군은 해상에서 약세였으나, 람세스 3세는 방어벽과 화살로 해안선을 방어하고, 해군을 동원해 적의 함대를 격파하는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람세스 3세는 해상민족을 가나안 지역에 정착시킨 것으로 전해지며, 그들은 훗날 플리스티아 같은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또한 람세스 3세는 재위 6년과 11년에 리비아 부족과 두 차례 전투를 벌여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3. 내부 갈등 및 경제적 어려움

잦은 외적 전쟁과 방어 비용 증가는 이집트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특히 전쟁에 필요한 자금과 자원이 점차 고갈되며 재정난이 가중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재위 29년에는 무덤을 조성하는 장인들과 노동자들이 식량 배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자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기록된 최초의 노동자 파업 사건으로, 당시 이집트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또한 람세스 3세 말기에는 기후 변화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곡물 가격이 급등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기원전 1140년경부터 약 20년 동안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농작물이 성장하지 못했고, 이는 기근으로 이어져 이집트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에 따라 곡물 가격이 폭등하였고, 이는 사회적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해상민족을 정복한 람세스3세
해상민족을 정복한 람세스3세

4. 종교와 건축 활동

통치 기간 동안 종교와 건축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룩소르와 카르낙에 웅장한 신전을 세웠고, 마디나트 하부에 자신의 장례 신전과 궁전, 복잡한 행정 건물을 지었습니다. 마디나트 하부 신전은 특히 외세의 침입을 대비한 방어시설의 성격이 짙습니다. 이곳의 벽면에는 해상민족과 벌였던 육상전 및 해상전 장면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람세스 3세가 세운 마디나트 하부 신전은 현재까지도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방어 전략과 군사적 성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건축 활동은 이집트의 위대한 문화적 유산을 남기려는 노력이자 외부 침입에 대응하려는 방어적인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5. 암살 음모 및 죽음

통치 말기에는 내부에서 왕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생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테이는 자신이 낳은 아들 펜타에레가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리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테이와 펜타에레를 중심으로 왕실 관리, 병사, 국고 담당자 등이 이 음모에 가담하였으며, 총 37명이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테이와 펜타에레를 포함한 주요 주모자들이 처형되었고, 그들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사후세계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 큰 처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는 테이와 펜타에레의 영원한 삶을 부정하는 상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도 하렘의 여인들은 재판관들을 유혹하여 처벌을 피하려 했으나 발각되었고, 유혹에 넘어간 재판관들 역시 처벌받았습니다.

람세스 3세가 음모로 인해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는 재위 32년에 사망하였으며, 미라를 분석한 결과 그의 목에 작은 상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6. 후세에 미친 영향

람세스 3세의 미라는 1886년에 발견되었고, 이후 현대 여러 매체에서 전형적인 이집트 미라로 묘사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무덤은 왕들의 계곡에서 가장 큰 무덤 중 하나로, 그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현대까지 남아 있는 그의 건축물과 전쟁 기록들은 이집트의 문화유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통치는 이집트가 외부의 침략 속에서도 어떻게 버텼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