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1861~1941년)는 시로 인도와 아시아 문화를 서구 세계에 알렸습니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교육을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간디에게 ‘마하트마’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습니다. 아시아인 최초로 191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 어린 시절과 교육과 초기 작품 활동
타고르는 하인들 손에서 자라며 집안을 돌아다니고 시골을 여행하며 자유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1873년에 아버지를 따라 히말라야 달하우지의 별장에서 역사를 포함한 다양한 학문과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며 고전 시에 대한 관심을 키웠습니다. 1880년대 여러 시집을 발표하며 예술적 기초를 다졌습니다. <아침의 노래>로 시작해, 1890년 <마나시>라는 시집을 발표했습니다. <마나시>에는 형식에 있어서 오드(odes, 특정한 사람 · 사물 · 사건에 부치는 시)를 비롯해서 뱅골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형식을 지닌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2. 영국 유학과 결혼생활
1878년 영국으로 유학 가서 런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셰익스피어 등 문학에 더 흥미를 느껴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1880년 인도로 돌아온 후 1883년 므리날리니 데비와 결혼했습니다. 1890년대에 아버지의 부동산을 관리하며 마을 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의 빈곤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1912년 발표한 <한 다발의 이야기들>에는 시골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과 작은 불행들이 담겨 있습니다.
3. 노벨문학상 수상과 활동
문학적 성취는 1912년에는 농촌 사람들의 삶을 다룬 <한 다발의 이야기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절정에 달했습니다. 스웨덴 학술원은 그의 시집 <기탄잘리>의 영역본을 서구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 대학살에 대한 항의로 작위를 반납했습니다.
그는 일본 등 외국의 지도자들에게도 인도 독립을 위한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자립과 지적 향상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25년에는 스와데시 운동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비판하며, 인도인들에게 맹목적인 혁명보다 점진적이고 명확한 목표가 필요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타고르는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인도의 독립을 지지했습니다.
말년에 타고르는 과학에 관심을 가져 1937년에는 과학 관련 에세이 <과학 입문>을 발표하고, 생물학, 물리학, 천문학 연구를 시와 결합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또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국가를 작사, 작곡했으며,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라빈드라 상기트’로 불리며 벵골 어권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4. 말년과 사망
타고르는 만성 질환으로 인해 1937년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회복했으나, 3년 뒤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1941년 자신이 자랐던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