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로마 제국의 기틀을 세운 왕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는 기원전 1세기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독일 서부 를 정복한 로마 장군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원로원의 경계 대상이 되었으며, 군대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을 일으켰습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후, 그는 집정관이 되어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독재적 성향을 보이자 절친 브루투스가 가담한 음모에서 암살당하였습니다.

1. 로마 원로원과의 갈등과 정복활동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영향력을 유럽으로 확장한 장군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갈리아 전쟁 동안 지금의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 서부를 정복하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 덕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요, 이에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로마로 진군했는데, 이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군대는 로마 중심부인 주피터 신전까지 진격했고, 이로 인해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유럽까지 적을 쫓았고 결국에는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한 이집트까지 갔습니다. 이집트를 떠나기 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여왕으로 세웠습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물리치며 로마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집정관 통치와 암살

내전 후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어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군사적 영웅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예를 들어 달력 개정을 통해 윤리우스력을 도입하고, 금융 정책을 수정하여 부채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독재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원로원 의원들은 그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왕정을 세울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에 그의 절친이자 정치 동료였던 브루투스를 포함한 여러 의원이 암살 계획을 세웠습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 중에 암살되었습니다. 그는 브루투스를 보고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겼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로마제국의 기틀을 세운 카이사르
로마제국의 기틀을 세운 카이사르

3. 카이사르 해적 사건

카이사르가 젊은 시절에 겪은 해적 사건은 그의 강한 성격과 결단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동지중해에서 해적에게 납치되었는데요, 해적들이 요구한 몸값보다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며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몸값을 주고 풀려난 후 그는 로마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소규모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그 후, 해적의 위치를 추적하여 공격했고, 모두 처형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정치적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4. 클로디우스와의 스캔들

기원전 62년, 카이사르는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중 스캔들에 휘말리게 됩니다. 로마의 귀족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여성만 참석 가능한 종교 의식에 남장을 하고 참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의식은 카이사르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이로 인해 클로디우스가 그의 아내 폼페이아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가정과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폼페이아와 이혼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나온 “카이사르의 아내는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는 격언은 청렴함과 명예를 상징하는 말로 남았습니다.

5. 카이사르의 독재관 지위와 공화정 붕괴

내전이 한창일 때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독재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비상 상황에서 독재관에게 비상통치권을 주기 위한 조치였지만, 위기가 진정되지 않으면서 그의 독재는 영구화되었습니다.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전쟁 포로의 신분을 개선하고, 식량 공급 문제를 해결했으며,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여러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공화정의 상징이던 원로원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 속주 시민들이 그를 신격화하는 것을 허용하고,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동전을 주조하도록 했습니다. 그 동전에는 ‘종신 독재관’이라는 문구가 새겨졌고, 이는 시민들 사이에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과도한 개인 숭배가 결국 카이사르의 공화정의 붕괴와 암살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6. 카이사르 사후 상황과 평가

카이사르는 정치와 군사에서 성공을 거두며 많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중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남긴 말로 유명합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며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개혁과 업적은 이후 로마 제국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유산은 로마 제국 역사에 깊이 남았습니다.